스티브 맥베이 목사님이 '101 Lies Taught in Church (Steve McVey)'라는 제목으로 유튜브에 게시한 내용들을 정리해서 책으로 편찬한 책이다. 제목부터도 상당히 논란을 불러 일으킬만 하지만 논란이라도 되고 이슈가 되서 그리스도인 안에 내주하시는 예수님을 경험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종교인을 양성하는 교회에 도전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책을 꼭 읽어볼 수 있기를 바라면서 대략 요점을 정리해 보았다.


1. 우리의 삶을 그리스도에게 드리면 구원 받는다.

구원 받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는가의 문제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구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며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이다.

무엇을 드려서 구원받는다는 논리는 하나님을 폄하하고 우리를 높이는 셈이다.

(요일4:10)

 

2. 그리스도인은 은혜로 구원받은 죄인일 뿐이다.

우리에게 죄인의식을 심어준다.

우리의 정체성은 행동이 아닌 출생의 문제다.

 

3.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하나님이 나의 삶을 변화시킨다.

하나님이 나의 행동을 바꾸셨다는 의미(수동적)로 이해하면 무리다.

죽었던 상태에서 살리셨기 때문에 그 이후의 새로운 삶은 하나님과 함께 능동적으로 사는 것이다.

 

4.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죄를 용서 받는다는 뜻이다.

죄 용서가 구원의 핵심은 아니다. 용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천국시민으로 산다는 것이다.

(17:2)

 

5.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의 의지로는 사랑하려고 노력해도 사랑할 수 없다.

누군가를 사랑할 마음이 없는 자에게 사랑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오히려 그의 사랑하지 못하는 무능함을 드러낼 뿐이다.

율법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에 대한 진실하고 올바른 내용을 담고 있지만, 우리에게 이를 실천할 능력을 주진 않는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아야 함이 먼저다.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 깊이를 알아갈 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율법의 명령 없이도 저절로 우러나는 것이다.

 

6. 약해진 신앙을 회복하는 방법은 새로이 헌신하는 것이다.

우리가 노력하면 할수록 실패할 가능성은 더 커진다. 승리의 비결은 노력이 아니라 믿음에 있기 때문이다.

자기결정, 자기훈련, 자기만족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부인,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 방법이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에서 교훈하듯이 가지는 오직 그 나무에 붙어 있는 결과로 열매를 맺게 된다.

 

7. 우리의 삶은 모두 그의 것이고, 나의 것은 없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하나님의 지배 아래 수동적으로 일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위임을 받아 함께 일하신 것처럼 우리도 함께 하는 것이다.

 

8. 그리스도는 우리 삶의 최우선 순위가 되셔야 한다.

우리의 신체가 나뉠 수 없고 모든 기관이 함께 유기적으로 움직여서 건강을 유지하듯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 전부여야만 한다.

예수님은 우리 삶의 첫 번째가 아니라 우리의 삶 그 자체다.

신앙, 결혼, , 취미 식의 순서가 아니라 모든 영역 안에서 우리의 행동과 태도의 근원이 되신다.

 

9. 우리 를 극복하는데 주력해야 한다.

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죄를 없애는데 효과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죄에 대해 무기력함을 드러낸다.

예수님께 온전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승리의 열쇠다.

죄에 향해 있던 모든 관심을 오직 예수님께만 기울이자.

(10:1~3 / 10:9)

 

10. 우리는 하나님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계속 구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로부터 완전히 해방하셨다. 예수님은 완벽한 제물이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에서 회복이 되었기에(이미 용서받아서) 죄를 고백할 수 있게 된 차원이다.

(13:39)

 

11. 잘못된 행동을 하면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멀어진다.

이미 우리 안에 사시는 분이 우리와 나뉘거나 멀어질 수 없다.

탕자의 비유에서 탕자는 아버지를 잊고 살았어도 아버지는 늘 탕자를 기억했다. 탕자는 변했어도 아버지는 변함이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역사로 우리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이냐가 중요할 뿐이다.

우리가 삶의 여러 부분에서 실패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신실하신 분이다.

진실의 기준은 우리의 감정이 아닌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약속에 있다.

 

12.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한다.

성경이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는 우리가 어떤 행동을 했을 때 얻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한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 의로움의 근거다. 그가 우리의 의로움이다.

성경은 우리와 우리가 할 일에 관한 내용이 아니라,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이 목적이다.

우리의 행동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교제 안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어야지 도덕 강령에 맞춰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삶의 지침이 담긴 핸드북이 아니다. 예수님에 관한 은혜의 책이며 예수님은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이다.

우리가 그 안에 살고 그가 우리 안에 살면 우리는 성경에 올바로 접근할 수 있다.

(딤후3:16~17 / 5:17)

 

13. 삶에서 하나님의 완벽한 뜻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고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예수님께 집중하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밝히 드러난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사랑의 하나님이 이미 하신 일보다는 우리가 하는 일에 더 초점을 맞추게 한다.

우리는 주변 풍조나 사람들의 의견에 귀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진리의 기준이라는 것을 알고 그에게 순종해야 한다.

(12:1 / 12:2 / 살전5:24 / 살전5:18)

 

14. 잘못된 행동을 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실망하신다.

실망은 하나님 입장에서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결과를 모른 채 기다리면서 그가 원하는 방향대로 일이 일어날 것을 바라고 있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모든 걸 알고 계신다.

사단은 우리가 잘못할 때 죄책감과 수치심을 이용해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드는 고도의 전략가이다.

종교에서는 도덕적 삶이 큰 부분을 차지하지만, 하나님이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우리가 그를 친밀하게 아는 것이다.

하나님을 친밀히 알 때 우리 삶의 모든 행동이 그 앎을 표현하게 된다.(포도나무와 가지)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행동 때문에 자책감에 빠지지 말고 그럴 때일수록 그를 바라보기를 원하신다.

 

15.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만한 어려움만 허락하신다.

사람으로서 견딜 수 있는 능력을 넘어서는 어려움을 겪은 인물은 성경에 많이 있다. 이 말은 괜찮지 않은데 괜찮은 것처럼 행동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삶은 고통스럽고 힘들다. 그러나 그럴 때라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가 쓰러지지 않도록 굳건히 붙드시고 어려움을 무사히 통과하게 하신다는 의미다.

(고전10:13 / 고후1:9)

 

16. 삶에는 세속적인 것과 거룩한 것이 있다.

이원론적 사고방식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삶은 하나다. 우리 삶은 전부 거룩하다.

우리는 어디든 예수님과 함께 간다.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을 담는 그릇이자 그것을 드러내는 통로다.

(2:10)

 

17. 우리에게는 부흥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모든 환경에서 일하신다. 지금은 이스라엘이 타락과 범죄 후에 고통당하면 회개하고 회복되면 조금 있다가 또 타락하고 하는 정기적 범죄 패턴이 있는 구약시대가 아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를 사는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계시가 필요하다. 신약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계속 환기시킨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새로운 결단을 반복시키는 일시적 감정적 고취보다 더 많이 우리를 변화시킨다. 그것은 우리를 영원히 변화시킨다.

(1:15~17 / 1:18~19 / 고후3:7~11 / 고후3:18)

 

18. 우리는 새로운 기름부음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줄 것이 더 남아 있다는 뜻인가?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기에 이미 기름부음을 받았다.

기름부음은 특별한 사람을 위한 전유물이 아니다.

(4:18~21 / 고후1:21~22 / 요일2:20 / 요일2:26~27)

 

19. 회개는 우리 삶에 하나님의 축복을 불러온다.

회개하지 않아서 축복을 못 받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삶을 변화시킬 능력이 없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무한한 은혜를 이해하게 될 때 하나님과 우리 자신에 대해 갖고 있던 잘못을 바로 잡을 수 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축복으로 회개하게 되는 것이다.

(2:4 / 고후5:14)

 

20. 은혜와 진리는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은혜와 진리는 다른 개념이 아니다. 마치 반대 개념인 듯 표현하는 것은 무리다.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다.

(1:17)

 

21.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만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성경 외에 다른 무언가로 말씀하신다고 해서 성경과 상반되는 말씀을 하신다는 뜻이 아니다.

성경을 읽을 때만 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건 아니다. 하나님은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말씀하시어 우리가 그의 음성을 들을 기회는 무한하다. ) 자연, 음악, 다른 사람을 통해서...

성부 하나님의 최상의 표현은 인성과 육체를 입고 오신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게 됨.

(19:1~4)

 

22. 우울해 하는 것은 죄다.

감정의 문제에 영적인 잣대로 접근하는 것은 무리다. 정서적으로 침체되어 있어도 영적으로는 강할 수 있다.

, 다윗, 사도바울 등도 겪었다. 연약한 인간에게 정신, 의지, 감정이 지쳐있는 자연스러운 상태.

정신적으로 우울한 사람들을 판단하는 눈으로 보지 말아야 한다.

(23:2~10 / 고후1:8~10)

 

23. 우리는 더 큰 믿음이 필요하다.

믿음은 점진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믿음이다.

믿음이 얼마나 크냐가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 누구에게 있느냐가 핵심이다. 헛된 믿음은 믿음의 크기가 클수록 믿는 사람에게 치명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내주하시니 우리에게는 충분한 믿음이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모든 것을 가진다.

믿음이 약하다고 느껴질 때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 의지해야 한다.

 

24. 죄가 있으면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없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인해서 의로워졌지만,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어도 죄의 유혹에서 완전한 면역성을 갖게 된 것은 아니다. 여전히 죄를 지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교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함께 먹고 자고 동행했던 수제자 베드로의 배신조차도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보다 크진 못했다.

예수님은 우리 삶을 회복시킬 수 있고, 최악으로 치닫는 상황마저 이겨내시어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우리 삶을 사용하실 수 있다. ) 에스더

 

25. 옛 본성을 굶기고 새 본성을 살찌워야 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여전히 두 본성이 있다고 암시하게 된다. 옛 본성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가 예수님의 본성을 가졌고 그 본성만이 우리의 유일한 본성이라고 말한다. 이 진실을 믿지 않으면 내면의 갈등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우리의 느낌이나 행동을 기초로 감정으로 자신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 정체성을 판단하시는 분이다.

지금 우리의 전쟁은 내면에 있는 죄의 권능과의 전쟁이다.

(6:6 / 3:3 / 6:3 / 2:20/ 7:16~25 / 벧후1:3~4)

 

26. 우리는 영적인 능력을 추구해야 한다.

신약성경은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능력을 받은 자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내주하시는 생명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잘못된 목표설정이다.

이미 받은 그리스도의 능력을 발견하기만 하면 된다.

그리스도를 소유했다는 의미의 엄청난 영향력을 인식하자.

우리 안에 사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2:9~10 / 1:8 / 4:13 /1:29 / 1:3 / 3:20~21)

 

27. 우리는 기독교 도덕률을 따라 살아야 한다.

우리 자신은 누군가의 도덕성을 판단할 위치에 있지 않다. 우리 삶의 기초는 도덕률이 아닌 예수님 중심에 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가 아닌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 속에 답이 있다.

(15:4~5)

 

28. 우리의 마음은 너무나 악하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인식을 저해하는 과거 인식이다.

(36:25~27 / 고후5:17)

 

29. 우리는 더욱 거룩하게 성장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행동으로 거룩해지지 않고 지금보다 더욱 거룩해 질 수도 없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구별되었지만 자신의 힘으로 지금보다 더 구별되게 할 수 없다.

우리 정체성에 맞게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것이다. ) 동화 왕자와 거지

(고전1:30 / 10:10 /12:4)

 

30. 우리는 그리스도를 더욱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해야 한다가 아니라 하고 싶다가 되어야 한다.

우리를 움직이는 것은 도덕적 의무감이 아닌 그리스도를 향한 열정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깊이 깨달을 때 예수님을 향한 사랑도 자연히 커진다.

그가 시작하시고 우리는 반응한다.

 

31. 우리는 신분상으로만 의롭다.

미묘한 부정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신분상으로만의롭게 하시려고 죄를 담당하셨는가?

구원의 가치를 폄하하는 인식이다.

성경의 가르침보다 자신의 주관적 경험에 더 가치를 두는 사고방식.

나의 정체성(그리스도인)과 현실의 삶의 차이에서 오는 딜레마를 신분상이라는 표현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고후5:21 / 5:19 /5:17)

 

32. 신앙이 있다면 모든 상황에서 긍정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긍정적 사고는 믿음이 아니다.

믿음은 무언가를 실제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무언가를 만들어 낼 창조적인 힘도 없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모든 상황을 주관하시는 분을 바라보고 의지한다는 뜻이다.

슬픔을 표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11:1)

 

33.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힘을 주신다.

율법을 지키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릴 대신하여 율법을 성취하시고 율법의 체계에서 우리를 완전히 벗어나게 하셨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율법을 어긴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율법과 상관이 없다.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이다.

율법은 사람들이 자신의 도덕적 성품이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알도록 주신 것이다.

율법은 계속해서 우리 눈을 하나님이 아닌 우리 자신에게 향하게 하고 정죄하게 한다. 그러나 은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고 그의 생명을 표현할 힘을 받아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한다.

(5:20 / 3:24 / 3:10 / 3:13 / 7:4~5)

 

34.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신다.

우리에겐 용서받기 위해 해야 할 어떤 것이 남아있지 않다.

성도들이 용서할 수 있는 이유는 이미 그리스도가 우리를 용서하셨기 때문이다.

십자가 사건 이후 용서받기 위해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받았기 때문에 용서해야 하는 것이다.

(6:14~15 / 9:16~17 / 22:20 / 8:13 / 1:7 / 2:13 / 4:32 / 3:12~13)

 

35. 다른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

다른 사람의 생각에 우리의 행동이 통제되는 방향은 좋지 않다.

초대 교회는 율법의 가르침을 받은 유대인과 그렇지 않은 이방인이 함께 있었고 두 그룹의 차이를 극복하고 연합해야 할 목표가 있었다. 율법주의적인 바리새인에게는 타협할 수 없었지만 다른 사람의 양심을 배려하기 위해 자신의 자유를 조금 제한 할 수 있을 정도로 형제를 사랑하는 자발적 자기제한이 있었다.

(2:11~21 / 14:1,5,10,13,15,21 / 15:1,7)

 

36. 하나님이 일을 성취하시는데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목적을 추구하는 일에 동참하라고 외치는 것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동참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 도움을 필요로 하는 분으로 보는 것은 도를 넘어서는 것이다.

우리가 안 한다고 하나님이 곤란해지시진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를 종이나 노예로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신부로 원하신다.

(3:18 / 22:38 / 17:25)

 

37. 가만히 있어서 녹스는 것보다 불타서 소진되는 편이 낫다.

불타서 소진되는 것은 녹 쓸어버리는 것만큼이나 좋지 못하다.

두 가지 방법밖에 없는 듯한 선택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계속 불타오르기를 바라신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의 힘과 끊임없는 생명과 능력으로 일한다면 불타 소진되지 않는다.

그저 일상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봉사의 기회를 발견하기만 하면 된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의 가벼운멍에와 짐을 지기 원하시지, 종교의 무거운 짐을 끌어안기를 바라지 않으신다.

(고후5:15 / 1:29 / 2:10 / 고후4:16)

 

38. 우리는 십일조를 하기 때문에 축복받는다.

말라기 선지서 당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십일조는 선택이 아닌 의무였다. 그러나 신약이후에는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로 자발적으로 우러나온 행위로 드리는 것이다.

복음이 전파되고 사역자를 돕고 가난하고 굶주린 자들을 돕기 위한 목적으로 드린다.

드리는 것 자체가 축복이다.

우리가 바치는 것은 의무에서가 아니라 오직 우리가 원하기 때문이다.

(3:8~11 / 14:17~20 / 요일4:19 / 고후8:7~8,12 / 고후9:7 / 6:6 / 고후9:12~14 / 20:35 )

 

39. 주일은 기독교의 안식일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 안식(토요일) 후 첫 날이었고 이후 신약성경에서 매주 첫 날(일요일)에 의미있고 중요한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새 계명 아래에서 율법의 효력이 상실되었고 안식일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성취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안식(쉼터)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안식에 들어간 우리는 365일이 안식일이다.

(20:8~11 / 31:14 / 20:7 / 고전16:1~2 / 1:10)

 

40. 오랫동안 열심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강도나 기도하는 시간을 보시고 우리를 돕는 분이 아니다. 기도를 반복적으로 많이 하면 응답받을 수 있다는 말은 인간이 하나님을 다룰 수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교묘한 거짓말이다.

불의한 재판장의 비유는 하나님이 탄원자의 어려움에 절대 무관심한 분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사법적인 것이 아니라 가족과도 같은 것이다.

(55:16~17 /142:1~2 / 18:1~8 / 6:7)

 

41.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성경공부 자체가 목적이 된 지식적 진리는 변화시킬 능력이 없다.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는 목적은 오직 를 배우는데 있다.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를 힘입어 사는 삶이란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보다 하나님은 누구신가에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예수님을 모르는 성경적 지식은 우리에게 독이 될 수 있다.

(8:32 / 5:39 / 14:6 / 고전8:1)

 

42. 우리는 용서하고 잊어야만 한다.

용서가 의무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용서 받음으로써 용서하는 능력과 열정이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다.

상처가 있었어도 완전히 치료받아서 그 상황을 기억하더라도 더 이상 아프지 않을 수 있다.

받은 상처를 잊지 못할 수 있으나 기억하지 않음으로써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다.

(43:5 / 벧후1:4 / 6:14~15 / 9:17 / 3:13 / 4:32 / 7:19 / 고전11:23~25)

 

43. 은혜는 매우 중요한 교리다.

숨을 쉬는 것이 생명의 한 부분이라고 말하는 논리와 같은 식이다. 은혜는 성경의 주제 중 하나가 아니다. 은혜는 복음의 핵심으로 성경 주제 그 자체다.

율법주의는 우리에 대해서만 말한다. ‘은혜는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이 이미 하신 일에 초점이 있다.

일상에서 하는 불의한 행동은 한 눈에 나쁘다고 인식될 정도로 두드러지지만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스스로 행하는 선한 행동은 우리 눈에 매우 멋진것으로 여겨진다.

성경은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아는 것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삶의 원천이 예수님이라는 것이고 모든 것이 은혜라는 것이다.

거짓말을 구별해 내기 위해서는 성경의 모든 주제, 우리 생활의 관심, 모든 생각, , 행동이 전부 예수님께 기초해야 한다.

은혜 = 예수 그리스도

(20:24 / 1:14 / 2:11~14 / 12:15)




사랑하는 연인이 교제하는 과정에서 서로를 알아가는 데, 자기가 알고 있는 이론적인 지식이나 정보로 상대방을 계속해서 대한다면 과연 그 관계가 깊어질 수 있을까?

엄청난 이벤트를 준비하고 열정을 불태워 자신의 마음을 받아달라고 거절 못 할 감동을 선사한다 하더라도 그날 이후 평범하고 지루한 일상의 흐름 속에 서서히 또는 즉각적으로 드러날 그날의 증거는 그냥 감정적이었던 것으로, 이기적인 이유였던 것으로 드러나기 쉽지 않은가. 그래서 결국엔 서로를 너무 몰랐던 것으로, 너무 감정적이었던 것으로 후회하기 쉽지 않던가.

교제의 만족감.

친밀함 속에 오래 지속된 자연스러움이 교제의 만족감을 높일 것이다.

입맞춤 몇 번, 칭찬 몇 번, 포옹 몇 번의 횟수가 아니라, 입맞춤의 이유, 칭찬하는 이유, 안아준 이유들이 훨씬 더 그 관계를 깊게 할 것이다. 물론 그냥 좋아서로 시작하더라도 말이다.

상대의 필요를 상대와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채워나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스티브 맥베이 목사님의 이 책은 사과를 먹어보지 못한 사람이 사과에 대한 논문을 읽는 것에서 직접 사과를 먹어본 사람이 그 맛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직접적이고 도전적이고 설득력 있었다.

먼지를 쓸어내기 위해 비질을 하는데 먼지를 쓸어내기는커녕 오히려 더 먼지를 일으키는 그런 과정 속에서 신앙생활을 해오고 있진 않은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옳고 그름에 더 명확한 근거들을 찾기 위해서 성경을 공부하고 그대로 살고자 노력하는 종교생활을 해오고 있다면 그것은 죄를 쓸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를 더욱 자극하는 것이라는 이 헛되고 공허한 죄책감의 종교생활을 청산해야 함을 도전하고 있는 책이다.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만큼 실감되는가.

 

아직도 하늘 저 멀리 어딘가에 계실 하나님을 향해 제발 듣기를 바라는 간절한 바람으로 자신의 소리만 외치는 기도를 하고 있다면 이 책을 더 늦기 전에 읽어보시길 바란다.

더불어서 다음에 소개할 [교회에서 가르치는 거짓말 43]과 함께 추천드리고 싶다.

 




요한계시록이 쓰인 1세기 당시는 우리나라가 일제시대 때 일본 천황에게 신사참배를 강요받았던 것처럼 도미티안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는 황제 숭배가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

이를 거부하면 투옥되거나 처형 당하게 되는, 신앙을 지키기엔 너무나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시기였다.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려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1세기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

그 당시 교회의 지도자였던 사도요한이 붙잡히고 감옥에 갇혀 생사를 알 수 없을 때

그의 안전을 걱정하며 슬퍼했을 교회를 향해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하며 격려하는 편지가 바로 요한계시록이다.

이남하 목사님은 '다 비친 코드'라고 표현하셨는데 정말 기막힌 네이밍이다.

유대인들은 이미 오래전에 계시문학 형태 문서화로 서로 교류했던 경험이 있었다.

바로 안티오커스 4세 때(기원전 2세기), 이스라엘 침공 후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철권통치 속에서 유대인들 사이에 계시문학 형태로 교류한 역사자료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금 1세기 로마제국의 핍박이 거세지자, 교회 밖의 사람들은 몰라도 교회 안의 성도들은 알 수 있는 내용(이미지)으로 요한계시록 편지 속에 암호처럼 쓰여졌고 그 암호는 구약성경의 이사야, 에스겔, 다니엘서에서 가져온 것들이었다. 그래서 다 비친 코드라고 하신거다.

요한계시록은 404절로 이루어져 있는데 518개에 달하는 구약성경 이미지들을 갖다 사용했다고 한다.

문제는 이 상징들을 현대인의 관점으로 보면서부터 시작된다.

일단, 이 책은 계시문학을 이해하는 게 너무 중요하다고 한다. 정말 맞는 말씀이다.

구약성경에서 가지고 온 이미지와 표현들인데 어떤 부분은 상징으로, 어떤 부분은 문자 그대로, 어떤 부분은 시간적으로, 현대 시대에 맞춰 끼우듯 제각각으로 무리하게 해석하기 때문에 어려워지는 것이 아닐까?

핵심은 교회다.

교회를 위로하고 힘을 주고 격려하기 위해 쓰인 책이 요한계시록이라는 것이다.

시간 흐름으로 미래를 해석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많다.

예수님의 재림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에 일어날 일이지만 요한계시록에서 전달하려고 하는 핵심 내용은

과거의 교회나, 현재의 교회, 미래의 교회 모두에게 경험되는,

심판 가운데 있는 세상에서 견고하게 보호되고 안전한 교회를 말씀하는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나 한 평생 죽음 앞에 두려워하며 하나님을 떠나 심판 가운데 있는 세상에서 현실 문제에 휘둘리며 고통 당하는 삶이 바로 심판 가운데 있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과학이 계속 발달하고 있고 문명이 고도화되고 있지만 인류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비참하게 느끼고 있다.

아닌가?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황충', '붉은 용',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는 짐승', '음녀' 등등..

현실의 삶 속에 그 어떤 무서운 심판과 공격이 있다 해도 새 생명으로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인류인 교회로서는 완벽하게 안전하다는 것과 이미 하늘에 앉힌바 되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 하고 있다는 사실을 뚜렷하게 인식하며 살아가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작전을 예수 그리스도의 몸 주고 사신 신부, 교회에게 알려주시고 그 목적을 달성하자는 연애편지인데, 이 편지가 로마제국의 탄압 과정에서 잘못되면 안 되니까 암호로 교회만 알아듣게 기록된 것이라고 말이다.

여기서 특별히 더 예민하게 와닿은 내용이 있다.

1세기 사도요한 시대의 교회에도 '영지주의'와 같은 이원론적 시각이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혼합된 사상이 영적인 것으로 둔갑되는 내면적 공격을 받고 있었다.

요한계시록에는 하나님의 능력을 모방하고 흉내 내는 사단의 속임수가 대조를 이루며 기록되고 있다.

사단의 정체성은 '거짓'이다.

혼탁해지기 시작하면 혼탁하기만 할 뿐이다.

교회 안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기 생각에서 출발한 신념과 열심이 얼마나 위험한지 그것이 바로 사망에 이르게 하는 무서운 심판인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건물로 지어진 교회가 교회가 아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꿈, 하나님의 목적을 이해하고 그 뜻대로 살아가는 성도이다.

이미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와 함께 깊은 교제를 하며 그 안에서 주어진 삶을 사는 사람이다.

여기가 바로 하나님의 완벽한 보호와 통치가 있는 천년 왕국이다.

질병이나 실패나 가난이나 죽음이 와서 내 형편이 달라지고 내 몸이 썩어져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를 떼 놓을 수 없다는 것을 알라는 것이니 요한계시록이 성도들에게 얼마나 힘이 되고 능력이 되는 말씀인가... 

 




성경을 가까이 한다면서도 가까운것 같지 않은 성경읽기를 꽤 오랫동안 해 왔던 것 같다.

성경읽기표를 체크하고 몇 번 읽었다는 뿌듯함에도

감동받은 구절들을 예쁘게 옮겨 적고

성경어플을 읽다가 감동받은 구절들을 복사해 따로 노트어플에 복사해 놓으며 내 것이 된냥 만족스러웠던 기분도

이 책을 만나면서 부끄러웠고 반성을 많이 하게 됐다.


이애실 사모님이 누구시지? 호감이 생겨 유튜브 영상도 찾아보았다. 너무 좋았다.

그래서 리빙올리브 유튜브채널에 재생목록으로 공유를 걸어놓았다.

참 감사하다. 그리고 귀하다는 생각이...

일단, 너무 쉬웠다. 문장도 예화도.

도표로 요약된 내용과 지도들을 참고로 한 눈에 스토리를 읽어내는 간단명료함이 성경공부에 새 기쁨을 주었다.

'참 열심히 공부하셨구나' 하고 그 열심이 부럽고 존경스러웠다.

잔느 귀용, 한나 스미스, 제시펜 루이스, 모두 여성이시고 너무 귀한 저작들을 남겨 놓으셨기에 내가 늘 존경하는 분들인데

이 책이 엄청나게 많이 읽혀지고 배워졌다니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가까이 하는데 도움을 받았겠다는 감사를 했다.

나도 이 기회를 통해 귀한 책을 집필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다.


'전복을 따러 갑시다'

성경 66권을 시간 순으로 연결해보니, 안 보이던게 보이는 기쁨이 너무도 크다.

실제 팔레스타인 지역의 역사와 성경 저자들의 시대 환경을 조명해보니,

설교가 길면 민폐가 되는 지금의 교회에서는 도저히 시도할 수 없는

성경 관점, 성경을 관통하는 핵심, 시대적 환경과 직분이 다른 40여명의 저자들이 쓰고자 한 내용이 일맥상통하게 읽혀지는 기쁨이다.


'예수 믿으면 구원 받습니다.'는 시작이다.


왜 우리는 구원받고 싶었을까?

왜 우리는 교회를 다니고 있는가?

왜 우리는 성경을 읽는가?


세베대의 아들 둘, 예수님과의 3년간 동행을 마치는 막바지에 가서도 자신들의 처세밖에는 안중에 없었던 그런 구원이 아니라

삶을 위협하는 핍박과 환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와 영광과 위엄이 그의 몸된 교회에 드러나는 구원인 것을

이 책을 제대로 읽는다면 알게 될거라 여겨진다. 유튜브 영상까지 함께 보면 더 좋을 것이다.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이 책은 출애굽 여정을 설명하는 지도가 아라비아가 아닌 시나이반도에 위치한다는 설명을 취하고 있다.

새로운 출애굽 여정을 담고있는 '떨기나무'라는 책의 내용과는 다르다.

기독교 학계에서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알지 못하지만, 기원전 역사를 다룸에 있어 새롭게 밝혀진 자료와 보고들을 첨부해서 이해하는 것이 훨씬 유익하리라 생각한다.

실제 성지순례를 다녀온 나로서도 '떨기나무'의 내용이 훨씬 동의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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