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맥베이 목사님이 '101 Lies Taught in Church (Steve McVey)'라는 제목으로 유튜브에 게시한 내용들을 정리해서 책으로 편찬한 책이다. 제목부터도 상당히 논란을 불러 일으킬만 하지만 논란이라도 되고 이슈가 되서 그리스도인 안에 내주하시는 예수님을 경험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종교인을 양성하는 교회에 도전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책을 꼭 읽어볼 수 있기를 바라면서 대략 요점을 정리해 보았다.
1. 우리의 삶을 그리스도에게 드리면 구원 받는다.
→ 구원 받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는가의 문제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구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며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이다.
무엇을 드려서 구원받는다는 논리는 하나님을 폄하하고 우리를 높이는 셈이다.
(요일4:10)
2. 그리스도인은 은혜로 구원받은 죄인일 뿐이다.
→ 우리에게 죄인의식을 심어준다.
우리의 정체성은 행동이 아닌 출생의 문제다.
3.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하나님이 나의 삶을 변화시킨다.
→ 하나님이 나의 행동을 바꾸셨다는 의미(수동적)로 이해하면 무리다.
죽었던 상태에서 살리셨기 때문에 그 이후의 새로운 삶은 하나님과 함께 능동적으로 사는 것이다.
4.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죄를 용서 받는다’는 뜻이다.
→ ‘죄 용서’가 구원의 핵심은 아니다. 용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천국시민으로 산다는 것이다.
(눅17:2)
5.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는 것이다.
→ 우리의 의지로는 사랑하려고 노력해도 사랑할 수 없다.
누군가를 사랑할 마음이 없는 자에게 사랑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오히려 그의 사랑하지 못하는 무능함을 드러낼 뿐이다.
율법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에 대한 진실하고 올바른 내용을 담고 있지만, 우리에게 이를 실천할 능력을 주진 않는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아야 함이 먼저다.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 깊이를 알아갈 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율법의 명령 없이도 저절로 우러나는 것이다.
6. 약해진 신앙을 회복하는 방법은 새로이 헌신하는 것이다.
→ 우리가 노력하면 할수록 실패할 가능성은 더 커진다. 승리의 비결은 노력이 아니라 믿음에 있기 때문이다.
자기결정, 자기훈련, 자기만족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부인,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 방법이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에서 교훈하듯이 가지는 오직 그 나무에 붙어 있는 결과로 열매를 맺게 된다.
7. 우리의 삶은 모두 그의 것이고, 나의 것은 없다.
→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하나님의 지배 아래 수동적으로 일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위임을 받아 함께 일하신 것처럼 우리도 함께 하는 것이다.
8. 그리스도는 우리 삶의 최우선 순위가 되셔야 한다.
→ 우리의 신체가 나뉠 수 없고 모든 기관이 함께 유기적으로 움직여서 건강을 유지하듯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 전부여야만 한다.
예수님은 우리 삶의 첫 번째가 아니라 우리의 삶 그 자체다.
신앙, 결혼, 일, 취미 식의 순서가 아니라 모든 영역 안에서 우리의 행동과 태도의 근원이 되신다.
9. 우리 ‘죄’를 극복하는데 주력해야 한다.
→ ‘죄’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죄를 없애는데 효과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죄에 대해 무기력함을 드러낸다.
예수님께 온전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승리의 열쇠다.
죄에 향해 있던 모든 관심을 오직 예수님께만 기울이자.
(히10:1~3 / 히10:9)
10. 우리는 하나님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계속 구해야 한다.
→ 예수님은 우리를 죄로부터 완전히 해방하셨다. 예수님은 완벽한 제물이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에서 회복이 되었기에(이미 용서받아서) 죄를 고백할 수 있게 된 차원이다.
(행13:39)
11. 잘못된 행동을 하면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멀어진다.
→ 이미 우리 안에 사시는 분이 우리와 나뉘거나 멀어질 수 없다.
탕자의 비유에서 탕자는 아버지를 잊고 살았어도 아버지는 늘 탕자를 기억했다. 탕자는 변했어도 아버지는 변함이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역사로 우리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이냐가 중요할 뿐이다.
우리가 삶의 여러 부분에서 실패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신실하신 분이다.
진실의 기준은 우리의 감정이 아닌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약속에 있다.
12.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한다.
→ 성경이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의’는 우리가 어떤 행동을 했을 때 얻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한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 의로움의 근거다. 그가 우리의 의로움이다.
성경은 우리와 우리가 할 일에 관한 내용이 아니라,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이 목적이다.
우리의 행동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교제 안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어야지 도덕 강령에 맞춰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삶의 지침이 담긴 핸드북이 아니다. 예수님에 관한 은혜의 책이며 예수님은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이다.
우리가 그 안에 살고 그가 우리 안에 살면 우리는 성경에 올바로 접근할 수 있다.
(딤후3:16~17 / 롬5:17)
13. 삶에서 하나님의 완벽한 뜻을 찾아야 한다.
→ 우리는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고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예수님께 집중하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밝히 드러난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사랑의 하나님이 이미 하신 일보다는 우리가 하는 일에 더 초점을 맞추게 한다.
우리는 주변 풍조나 사람들의 의견에 귀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진리의 기준이라는 것을 알고 그에게 순종해야 한다.
(롬12:1 / 롬12:2 / 살전5:24 / 살전5:18)
14. 잘못된 행동을 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실망하신다.
→ ‘실망’은 하나님 입장에서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결과를 모른 채 기다리면서 그가 원하는 방향대로 일이 일어날 것을 바라고 있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모든 걸 알고 계신다.
사단은 우리가 잘못할 때 죄책감과 수치심을 이용해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드는 고도의 전략가이다.
종교에서는 도덕적 삶이 큰 부분을 차지하지만, 하나님이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우리가 그를 친밀하게 아는 것이다.
하나님을 친밀히 알 때 우리 삶의 모든 행동이 그 앎을 표현하게 된다.(포도나무와 가지)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행동 때문에 자책감에 빠지지 말고 그럴 때일수록 그를 바라보기를 원하신다.
15.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만한 어려움만 허락하신다.
→ 사람으로서 견딜 수 있는 능력을 넘어서는 어려움을 겪은 인물은 성경에 많이 있다. 이 말은 괜찮지 않은데 괜찮은 것처럼 행동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삶은 고통스럽고 힘들다. 그러나 그럴 때라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가 쓰러지지 않도록 굳건히 붙드시고 어려움을 무사히 통과하게 하신다는 의미다.
(고전10:13 / 고후1:9)
16. 삶에는 세속적인 것과 거룩한 것이 있다.
→ 이원론적 사고방식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삶은 하나다. 우리 삶은 전부 거룩하다.
우리는 어디든 예수님과 함께 간다.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을 담는 그릇이자 그것을 드러내는 통로다.
(엡2:10)
17. 우리에게는 부흥이 필요하다.
→ 하나님은 모든 환경에서 일하신다. 지금은 이스라엘이 타락과 범죄 후에 고통당하면 회개하고 회복되면 조금 있다가 또 타락하고 하는 정기적 범죄 패턴이 있는 구약시대가 아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를 사는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계시’가 필요하다. 신약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계속 환기시킨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새로운 결단’을 반복시키는 일시적 감정적 고취보다 더 많이 우리를 변화시킨다. 그것은 우리를 영원히 변화시킨다.
(엡1:15~17 / 엡1:18~19 / 고후3:7~11 / 고후3:18)
18. 우리는 새로운 기름부음이 필요하다.
→ 하나님이 우리에게 줄 것이 더 남아 있다는 뜻인가?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기에 이미 기름부음을 받았다.
기름부음은 특별한 사람을 위한 전유물이 아니다.
(눅4:18~21 / 고후1:21~22 / 요일2:20 / 요일2:26~27)
19. 회개는 우리 삶에 하나님의 축복을 불러온다.
→ 회개하지 않아서 축복을 못 받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삶을 변화시킬 능력이 없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무한한 은혜를 이해하게 될 때 하나님과 우리 자신에 대해 갖고 있던 잘못을 바로 잡을 수 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축복으로 회개하게 되는 것이다.
(롬2:4 / 고후5:14)
20. 은혜와 진리는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 은혜와 진리는 다른 개념이 아니다. 마치 반대 개념인 듯 표현하는 것은 무리다.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다.
(요1:17)
21.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만 말씀하신다.
→ 하나님이 성경 외에 다른 무언가로 말씀하신다고 해서 성경과 상반되는 말씀을 하신다는 뜻이 아니다.
성경을 읽을 때만 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건 아니다. 하나님은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말씀하시어 우리가 그의 음성을 들을 기회는 무한하다. 예) 자연, 음악, 다른 사람을 통해서...
성부 하나님의 최상의 표현은 인성과 육체를 입고 오신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게 됨.
(시19:1~4)
22. 우울해 하는 것은 죄다.
→ 감정의 문제에 영적인 잣대로 접근하는 것은 무리다. 정서적으로 침체되어 있어도 영적으로는 강할 수 있다.
욥, 다윗, 사도바울 등도 겪었다. 연약한 인간에게 정신, 의지, 감정이 지쳐있는 자연스러운 상태.
정신적으로 우울한 사람들을 판단하는 눈으로 보지 말아야 한다.
(욥23:2~10 / 고후1:8~10)
23. 우리는 더 큰 믿음이 필요하다.
→ 믿음은 점진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믿음이다.
믿음이 얼마나 크냐가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 누구에게 있느냐가 핵심이다. 헛된 믿음은 믿음의 크기가 클수록 믿는 사람에게 치명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내주하시니 우리에게는 충분한 믿음이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모든 것을 가진다.
믿음이 약하다고 느껴질 때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 의지해야 한다.
24. 죄가 있으면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없다.
→ 우리는 예수님으로 인해서 의로워졌지만,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어도 죄의 유혹에서 완전한 면역성을 갖게 된 것은 아니다. 여전히 죄를 지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교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함께 먹고 자고 동행했던 수제자 베드로의 배신조차도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보다 크진 못했다.
예수님은 우리 삶을 회복시킬 수 있고, 최악으로 치닫는 상황마저 이겨내시어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우리 삶을 사용하실 수 있다. 예) 에스더
25. 옛 본성을 굶기고 새 본성을 살찌워야 한다.
→ 그리스도인에게 여전히 두 본성이 있다고 암시하게 된다. 옛 본성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가 예수님의 본성을 가졌고 그 본성만이 우리의 유일한 본성이라고 말한다. 이 진실을 믿지 않으면 내면의 갈등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우리의 느낌이나 행동을 기초로 감정으로 자신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 정체성을 판단하시는 분이다.
지금 우리의 전쟁은 내면에 있는 죄의 권능과의 전쟁이다.
(롬6:6 / 골3:3 / 롬6:3 / 갈2:20/ 롬7:16~25 / 벧후1:3~4)
26. 우리는 영적인 능력을 추구해야 한다.
→ 신약성경은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능력을 받은 자’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내주하시는 생명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잘못된 목표설정이다.
이미 받은 그리스도의 능력을 발견하기만 하면 된다.
그리스도를 소유했다는 의미의 엄청난 영향력을 인식하자.
우리 안에 사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골2:9~10 / 행1:8 / 빌4:13 /골1:29 / 엡1:3 / 엡3:20~21)
27. 우리는 기독교 도덕률을 따라 살아야 한다.
→ 우리 자신은 누군가의 도덕성을 판단할 위치에 있지 않다. 우리 삶의 기초는 도덕률이 아닌 예수님 중심에 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가 아닌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 속에 답이 있다.
(요15:4~5)
28. 우리의 마음은 너무나 악하다.
→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인식을 저해하는 과거 인식이다.
(겔36:25~27 / 고후5:17)
29. 우리는 더욱 거룩하게 성장해야 한다.
→ 우리는 우리의 행동으로 거룩해지지 않고 지금보다 더욱 거룩해 질 수도 없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구별되었지만 자신의 힘으로 지금보다 더 구별되게 할 수 없다.
우리 정체성에 맞게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것이다. 예) 동화 ‘왕자와 거지’
(고전1:30 / 히10:10 /히12:4)
30. 우리는 그리스도를 더욱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 ‘해야 한다’가 아니라 ‘하고 싶다’가 되어야 한다.
우리를 움직이는 것은 도덕적 의무감이 아닌 그리스도를 향한 열정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깊이 깨달을 때 예수님을 향한 사랑도 자연히 커진다.
그가 시작하시고 우리는 반응한다.
31. 우리는 신분상으로만 의롭다.
→ 미묘한 부정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신분상으로만’ 의롭게 하시려고 죄를 담당하셨는가?
구원의 가치를 폄하하는 인식이다.
성경의 가르침보다 자신의 주관적 경험에 더 가치를 두는 사고방식.
나의 정체성(그리스도인)과 현실의 삶의 차이에서 오는 딜레마를 ‘신분상’이라는 표현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고후5:21 / 롬5:19 /롬5:17)
32. 신앙이 있다면 모든 상황에서 긍정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 긍정적 사고는 믿음이 아니다.
믿음은 무언가를 실제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무언가를 만들어 낼 창조적인 힘도 없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모든 상황을 주관하시는 분을 바라보고 의지한다는 뜻이다.
슬픔을 표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히11:1)
33.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힘을 주신다.
→ 율법을 지키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릴 대신하여 율법을 성취하시고 율법의 체계에서 우리를 완전히 벗어나게 하셨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율법을 어긴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율법과 상관이 없다.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이다.
율법은 사람들이 자신의 도덕적 성품이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알도록 주신 것이다.
율법은 계속해서 우리 눈을 하나님이 아닌 우리 자신에게 향하게 하고 정죄하게 한다. 그러나 은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고 그의 생명을 표현할 힘을 받아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한다.
(롬5:20 / 갈3:24 / 갈3:10 / 갈3:13 / 롬7:4~5)
34.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신다.
→ 우리에겐 용서받기 위해 해야 할 어떤 것이 남아있지 않다.
성도들이 용서할 수 있는 이유는 이미 그리스도가 우리를 용서하셨기 때문이다.
십자가 사건 이후 용서받기 위해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받았기 때문에 용서해야 하는 것이다.
(마6:14~15 / 히9:16~17 / 눅22:20 / 히8:13 / 엡1:7 / 골2:13 / 엡4:32 / 골3:12~13)
35. 다른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
→ 다른 사람의 생각에 우리의 행동이 통제되는 방향은 좋지 않다.
초대 교회는 율법의 가르침을 받은 유대인과 그렇지 않은 이방인이 함께 있었고 두 그룹의 차이를 극복하고 연합해야 할 목표가 있었다. 율법주의적인 바리새인에게는 타협할 수 없었지만 다른 사람의 양심을 배려하기 위해 자신의 자유를 조금 제한 할 수 있을 정도로 형제를 사랑하는 자발적 자기제한이 있었다.
(갈2:11~21 / 롬14:1,5,10,13,15,21 / 롬15:1,7)
36. 하나님이 일을 성취하시는데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다.
→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목적을 추구하는 일에 동참하라고 외치는 것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동참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 도움을 필요로 하는 분으로 보는 것은 도를 넘어서는 것이다.
우리가 안 한다고 하나님이 곤란해지시진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를 종이나 노예로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신부로 원하신다.
(겔3:18 / 민22:38 / 행17:25)
37. 가만히 있어서 녹스는 것보다 불타서 소진되는 편이 낫다.
→ 불타서 소진되는 것은 녹 쓸어버리는 것만큼이나 좋지 못하다.
두 가지 방법밖에 없는 듯한 선택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계속 불타오르기를 바라신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의 힘과 끊임없는 생명과 능력으로 일한다면 불타 소진되지 않는다.
그저 일상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봉사의 기회를 발견하기만 하면 된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의 ‘가벼운’ 멍에와 짐을 지기 원하시지, 종교의 무거운 짐을 끌어안기를 바라지 않으신다.
(고후5:15 / 골1:29 / 엡2:10 / 고후4:16)
38. 우리는 십일조를 하기 때문에 축복받는다.
→ 말라기 선지서 당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십일조는 선택이 아닌 의무였다. 그러나 신약이후에는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로 자발적으로 우러나온 행위로 드리는 것이다.
복음이 전파되고 사역자를 돕고 가난하고 굶주린 자들을 돕기 위한 목적으로 드린다.
드리는 것 자체가 축복이다.
우리가 바치는 것은 의무에서가 아니라 오직 우리가 원하기 때문이다.
(말3:8~11 / 창14:17~20 / 요일4:19 / 고후8:7~8,12 / 고후9:7 / 갈6:6 / 고후9:12~14 / 행20:35 )
39. 주일은 기독교의 안식일이다.
→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 안식(토요일) 후 첫 날이었고 이후 신약성경에서 매주 첫 날(일요일)에 의미있고 중요한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새 계명 아래에서 율법의 효력이 상실되었고 안식일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성취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안식(쉼터)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안식에 들어간 우리는 365일이 안식일이다.
(출20:8~11 / 출31:14 / 행20:7 / 고전16:1~2 / 계1:10)
40. 오랫동안 열심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신다.
→ 하나님은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강도나 기도하는 시간을 보시고 우리를 돕는 분이 아니다. 기도를 반복적으로 많이 하면 응답받을 수 있다는 말은 인간이 하나님을 다룰 수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교묘한 거짓말이다.
불의한 재판장의 비유는 ‘하나님이 탄원자의 어려움에 절대 무관심한 분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사법적인 것이 아니라 가족과도 같은 것이다.
(시55:16~17 /시142:1~2 / 눅18:1~8 / 마6:7)
41.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 성경공부 자체가 목적이 된 지식적 진리는 변화시킬 능력이 없다.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는 목적은 오직 ‘그’를 배우는데 있다.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를 힘입어 사는 삶이란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보다 하나님은 누구신가에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예수님을 모르는 성경적 지식은 우리에게 독이 될 수 있다.
(요8:32 / 요5:39 / 요14:6 / 고전8:1)
42. 우리는 용서하고 잊어야만 한다.
→ 용서가 의무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용서 받음으로써 용서하는 능력과 열정이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다.
상처가 있었어도 완전히 치료받아서 그 상황을 기억하더라도 더 이상 아프지 않을 수 있다.
받은 상처를 잊지 못할 수 있으나 기억하지 않음으로써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다.
(사43:5 / 벧후1:4 / 마6:14~15 / 히9:17 / 골3:13 / 엡4:32 / 미7:19 / 고전11:23~25)
43. 은혜는 매우 중요한 교리다.
→ 숨을 쉬는 것이 생명의 한 부분이라고 말하는 논리와 같은 식이다. 은혜는 성경의 주제 중 하나가 아니다. 은혜는 복음의 핵심으로 성경 주제 그 자체다.
율법주의는 ‘우리’에 대해서만 말한다. ‘은혜’는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이 이미 하신 일에 초점이 있다.
일상에서 하는 불의한 행동은 한 눈에 ‘나쁘다’고 인식될 정도로 두드러지지만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스스로 행하는 선한 행동은 우리 눈에 매우 ‘멋진’ 것으로 여겨진다.
성경은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아는 것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삶의 원천이 예수님이라는 것이고 모든 것이 은혜라는 것이다.
거짓말을 구별해 내기 위해서는 성경의 모든 주제, 우리 생활의 관심, 모든 생각, 말, 행동이 전부 예수님께 기초해야 한다.
은혜 = 예수 그리스도
(행20:24 / 요1:14 / 딛2:11~14 / 히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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